1. Introduction
이번에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의 합병을 앞두고 남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소진할 겸 잠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중 들르게 된 곳은 마운틴 뷰(Mountain View)에 위치한 컴퓨터 역사 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 이었다. 이 박물관은 기술의 발전사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희귀하고 중요한 소장품들을 보유하고 있어, 평소 IT와 기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큰 흥미를 끌었다. 개인적으로 마운틴뷰와 이 근처 동네는 너무 깨끗하고 조용한 동네라서 너무 마음에 든다. 만약에 San Francisco 주변에서 출발하고 운전을 좋아한다면, US101 타고 바로 오는것 보다는 SR 1 국도를 타고 84번 국도(La Honda Rd)를 타고 넘어오면 낭만 있는 경치와 와인딩을 즐길 수 있다.
사실 그동안 박물관을 3시간 넘게 정독하며 둘러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살펴볼 만큼 흥미로웠다. 귀국 후 이 내용에 대해 더 조사하였고,이곳에서 알게 된, 잘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컴퓨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2. 진정한 최초의 컴퓨터는? ABC와 ENIAC의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컴퓨터”라 하면 ENIAC(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 을 떠올린다. 1940년대에 개발된 ENIAC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크기와 엄청난 전력 소비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ENIAC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컴퓨터가 최초의 컴퓨터 타이틀을 주장하고 있다. 그 이름은 아타나소프-베리 컴퓨터(Atanasoff–Berry Computer, ABC) 이다. ABC가 최초의 컴퓨터로 인정받는 과정은 과학적 성과뿐만 아니라 법적 분쟁과 특허, 그리고 기업의 영향력에 의해 역사적 서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아타나소프-베리 컴퓨터의 탄생
1930년대 후반, 존 빈센트 아타나소프라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는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복잡한 수학 계산을 자동으로 처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는 1937년 어느 날,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들른 도로변 카페에서 컴퓨팅 장치의 기본 아이디어를 냅킨에 간단히 메모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메모는 전자식 계산 장치의 핵심 요소를 담고 있었고, 이후 컴퓨터 과학의 큰 진보로 이어졌다.
아타나소프는 그의 대학원생 클리포드 베리와 함께 ABC를 개발했고, 이 장치는 동시에 여러 개의 연립방정식을 풀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ABC는 데이터를 2진법으로 표현하고 진공관을 사용한 전자 스위칭을 구현했는데, 이는 이후 컴퓨터들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다만 ABC는 완전한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기계는 아니었고, 특정 계산에 특화된 계산기로 제한적인 기능만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발명이었다.
Atanasoff-Berry Computer (Computer History Museum)
ENIAC과 “최초” 타이틀을 둘러싼 법적 논쟁
ENIAC은 그보다 약간 뒤인 1940년대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존 모클리와 프레스퍼 에커트에 의해 개발되었다. ENIAC은 ABC와 달리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범용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컴퓨터로, 전자식 대형 컴퓨터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며 군사와 원자 연구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ENIAC 발명자들은 1947년에 특허를 신청하여 독점적인 권리를 확보하려 했고, 이후 스페리 랜드(Sperry Rand)라는 회사가 ENIAC의 특허를 통해 다른 기업들에게 라이선스 비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니웰과 컨트롤 데이터 코퍼레이션(CDC) 이 ENIAC의 특허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 이유는 ENIAC의 공동 발명자인 존 모클리가 1941년에 아타나소프의 실험실을 방문해 ABC를 직접 보고 여러 개념을 논의했기 때문입니다. ENIAC이 ABC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고 주장한 것이다.
ENIAC: The First Electronic Computer. Until it Wasn’t. (Computer History Museum)
법원 판결: 아타나소프-베리 컴퓨터의 공로 인정
1973년, 이 복잡한 법적 분쟁은 “honeywell, Inc. v. Sperry Rand Corp” 소송으로 법원에 다다랐다. 법원은 허니웰 측의 손을 들어주며, ENIAC이 아타나소프와 베리가 개발한 ABC의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ENIAC의 특허는 무효화됐고, ABC가 전자식 컴퓨터의 진정한 시작점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 판결은 20세기의 중요한 발명 중 하나가 특정 기업의 소유가 아닌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973 Newyork Times Archives) A Basic Computer Patent At Sperry Rand Annulled
아타나소프-베리 컴퓨터가 덜 알려진 이유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ENIAC을 최초의 컴퓨터로 기억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규모와 대중성: ENIAC은 ABC에 비해 훨씬 크고 범용성이 뛰어났으며,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프로그래밍 기능: ENIAC은 범용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컴퓨터였고, ABC는 특정 연산에 특화된 계산기여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컴퓨터에 더 가까웠다.
- 기업의 영향력: 스페리 랜드는 ENIAC의 성과를 알리고 특허를 방어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며 ENIAC의 인지도를 높였다.
- 물리적 유산: ENIAC은 현재까지 보존 및 전시된 반면, ABC는 대부분 해체되어 잊혀졌고, 이후에야 원본을 기반으로 한 복제본이 제작되었다.
ABC가 진정한 최초의 전자 컴퓨터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단순한 발명이나 특허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타나소프와 베리가 도입한 2진법 계산과 전자 처리 방식은 이후 모든 컴퓨터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들의 아이디어는 오늘날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모든 컴퓨팅 장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ABC는 ENIAC만큼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컴퓨터 과학의 기초를 다진 이들의 노력은 혁신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준다. 이 외에도 Computer History Museum에는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 할만한 다양한 소장품이 많으니 한번 쯤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